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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40. <부정공>귀정공휘연원묘갈명(龜汀公諱淵元墓碣銘)
1. 문헌 목록 〉22. 22世 〉42. <부정공>절민공파종유사휘창열사적비문(節愍公派宗有司諱昶烈事績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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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부정공>일헌처사휘민식묘갈명(一軒處士諱敏植墓碣銘)
一軒處士諱敏植墓碣銘 (일헌처사휘민식묘갈명) 當此蹄跡充滿之日以篤學力承先貽後而不失古家本色者其惟一軒處士趙翁諱敏植字士清而己乎趙氏系出玉川勝國檢校諱璋其初祖農隱元吉虔谷瑜皆建祠享之我 朝有相好亭智崙梅窓大成皆以學行著曾祖諱洙祖諱昌灌有文學考諱章燮號諱堂以明理學斥邪説爲己任妣平山申氏命熙其父有婦德翁以高宗辛巳四月二十八日生梧枝里第生有異質自異凡兒受業家庭文思日新及長夙興冠帶定省以爲常危坐欨書尤致意於小學四書百家書雜一不着眼以敬爲學本持身禮處事義篤倫理嚴尊攘志氣剛勁言論正大事親愛敬敎子義方嚴於祭祀恭於賓朋與人和而不句合不出人城市至庚戌之變避世凡三遷而八頭流之赤旗耕樵以供菽水三餘父子祖孫吾冠吾服讀書答問不知世之爲秦爲漢前後丁難哀毀過禮幾至滅性兩付盡心衰不去身疏食終制尚有餘哀逮至光復復歸梧枝里瀟然一室儼然端坐戒子孫曰風樹不逮自古然矣孝須及時吾家世孝孝友文行見稱汝等深戒勿失本色華夷之分係於一髮去此則非吾子孫戒門生亦如此尤嚴男女之別授受之際必使物置地而後各取見善若巳惡惡不假而改不念舊嘗曰敬以直内持守有素涵養純固本領乃立知之非難行之爲貴欲知行幷進只在精一論人物性則以爲理是氣根理不偏全而惟氣是從則理烏可爲萬物之原乎論心則以爲合理氣而其所以爲軆則理也論太極則以爲近世學者執言迷旨使太極爲無主張惟陰陽是從之物惡乎可哉壽登九耋康寧無恙以天年考終純宗後再庚戌正月九日德山村後巽原其葬也配順興安氏泳鎭女有婦德先翁卒附左男東璉東璿東璨東球東琳皆有文行女壻光山金斗錫東璉無育以東球男寬容爲子東璿男春容寅容東璨男權容善容業儒有望不幸早夭東球男寬容出系允容東琳男希容吉容外孫永杓永柱餘不錄窃惟翁踈髯長身眉字秀拔風標峻整有之死不改之志兼百折不屈之氣才性敏果臨事生風而早知古人爲己之學以篤實誠勤成其德器足以爲需世之材矣時値滄桑屈首林下率五子不梁腥羶獨保樓上靑丘於是造詣益深聲望日隆南方之尚業請文者足跡相連無二毫矜持自高之意盖古之遺佚之徒歟秉柝既取其遺文勘正五册以付印壽傳次允東璨以爲詳我先人事行無知子而強之不能絡辭敘其世系事行如右撮其要爲之銘曰 篤生名門學有本領持守涵養用工於靜知行幷進精一猛省每言太極近世學者執言迷旨爲無骨子物性偏全謂非本然至於論心亦主氣邉氣奪理位是大憂焉又云一髮華夷是分岩不保此非吾子孫生不對汝死不歆汝何其懇切而又嚴厲摭此爲銘用詔來許德山之孰不敬慕 歲癸丑大壯之月既望 竹山 安秉柝 謹撰 族姪 光萬 謹書 일헌처사휘민식묘갈명(軒處士諱敏植墓碣銘) 오늘날처럼 오랑캐의 발자취가 기득할 때 독실(篤實)하게 배워 선조(先祖)의 사업을 잘 계승하여 후손에게 전해주어 고가(古家)의 유풍(遺風)을 잃지 않은 분은 오직 일헌처사(一軒處士) 휘(諱) 민식(敏植), 자(字) 사청(士淸)인 조공(趙公)뿐이다. 옥천조씨는 고려 때 검교대장군을 지낸 휘 장(璋)을 시조(始祖)로 하며, 농은(農隱) 원길(元吉), 건곡(虔谷) 유(瑜)는 모두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받들고 있다. 우리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상호정(相好亭) 지륜(智崙), 매창공(梅窓公) 대성(大成)이 모두 학문과 행의(行義)로 이름이 알려졌다. 증조의 휘는 수(洙), 할아버지의 휘는 창관(昌灌)인데 문학으로 유명하셨으며, 아버지 휘 장섭(章燮)은 호가 위당(諱堂)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사설(邪説)을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며,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는 명희(命熙)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으셨다. 공은 고종(高宗) 신사년(一八八一) 八월 二十八일 오지리(梧枝里) 집에서 태어나셨다.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을 지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가정의 학문을 배워 학문이 날로 새로워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부모님께 문안을 올리고 단정히 앉아서 책을 읽었는데 특히 소학(小學)과 사서(四書)에 마음을 써 백가(百家)의 잡서(雜書)는 전혀 읽지 않았다. 경(敬)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고 몸가짐은 예(禮)로써 하고 일처리는 의(義)로써 하여 윤리(倫理)를 돈독히 하였다.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의리에 엄격하고, 지기(志氣)가 굳세고 언론(言論)이 정대하였으며 부모님을 존경과 사랑으로 모시고 자녀를 의리로써 가르쳤다. 제사를 엄숙하게 모시고 친구들을 공손하게 사귀고 사람들과는 온화하게 대하였으나 구차스레 뜻을 맞추려고 하지는 않았다. 성(城)이나 저자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경술년의 국치(國恥)를 당하자 세상을 피해 세번이나 이사를 하여 지리산(智異山) 적기(赤旗)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틈틈이 삼부자(三父子)가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관(冠)을 쓰고서 독서하며 학문을 토론하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모르고 지내셨다. 부모님의 상(喪)을 당해서는 애통해 함이 예(禮)보다 지나쳐서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으며 상복(喪服)을 벗은 일이 없이 소식(素食)을 하며 三년복(服)을 벗었는데 그러고도 슬픔이 남아 있었다. 광복(光復) 후에 다시 오지리로 돌아와 가난한 집에서 엄숙하게 단정히 앉아서 자손들을 불러 훈계하기를, 부모님에게 생전에 효도(孝道)를 다하지 못하는 것은 예로부터 누구나 다 그랬는데 효도는 모름지기 살아 있을 때 해야 한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효도와 문장, 그리고 행실로 알려졌으니, 너희들은 조심하여 본분을 잃지 말라.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분은 터럭 하나의 차이니, 이런 본분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집 자손이 아니다고 하셨다. 문생(門生)들에게도 역시 이와 같이 경계하였다. 또 남녀의 구별을 엄히 하여 남녀 사이에 물건을 주고받을 때에는 반드시 그 물건을 땅에 내려 놓은 후에 각자 가져가게 하였으며, 선한 일을 보면 자기의 일처럼 좋아하고 악한 일을 보면 아주 미워했으며, 지나간 유감(遺憾)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경(敬)으로써 마음을 바로 하고 평소 지조(持操)를 지키며 수양을 확고하게 해야 본바탕이 서게 되는데, 이런 이치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지식과 행실을 함께 실천하려면 정일(精一)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 인물성(人物性)에 대해서는 이르기를, 이(理)는 기(氣)의 근본으로 이는 편전(偏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가 따르는 것이니, 이(理)가 어떻게 만물의 근원이겠는가? 하였다. 심(心)에 대해서는 이르기를, 이기(理氣)가 합친 것인데 체(體)가 되는 것이다고 하였고, 태극(太極)에 대해서 논하기를, 근세의 학자들이 고집하여 뜻을 미혹시켜 태극은 주장(主張)함이 없고 오직 음양(陰陽)에 따르는 물건이라고 하는데 어찌 옳겠는가? 하였다. 구순(九旬) 때까지 건강하여 천수(天壽)를 누리고 一九七○(庚戌) 정월 九일에 돌아가시니, 덕산촌(德山村) 뒤 손좌(巽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영진(泳鎭)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으셨는데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부좌이다. 아들은 동련(東璉), 동선(東璿), 동찬(東璨), 동구(東球), 동림(東琳)인데 모두 문학과 행실로 알려졌다. 딸은 광산인(光山人) 김두석(金斗錫)에게 출계하였다. 동련은 아들이 없어서 동구의 아들 관용(寬容)을 양자로 삼고, 동선의 아들은 춘용(春容), 인용(寅容)이요, 동찬의 아들은 권용(權容), 선용(善容)인데, 선용은 유업(儒業)을 이어받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불행하게 일찍 죽었다. 동구의 아들 관용은 출계(出系)하고 윤용(允容)이며, 동림의 아들은 희용(希容), 길용(吉容)이며, 외손은 영표(永杓) 영주(永柱)인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생각하건대 공은 수염은 듬성하고 키가 컸으며 미목(眉目)이 아름답고 풍채가 훌륭하셨다. 뜻이 확고하여 고치지 않을 절조를 지녔으며, 백절불굴(百折不屈)의 기개를 가지셨다. 거기다가 영민한 성품과 과단성 있는 일처리를 하셨다. 일찍부터 옛사람들의 자기 수양(修養)하는 학문을 할 줄을 알아서 독실하게 실천하였으며 덕성(德誠)을 길러 세상의 인재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서 초야(草野)에 묻혀 다섯 아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게 하여 홀로 깨끗한 지조를 지키셨다. 그래서 조예가 더 깊어지고 명성이 날로 더 드러나 남방에서 배우기를 청하는 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졌지만 털끔만큼도 오만하고 고상한 체하지 않았으니 이분이야 말로 옛날 유일(遺逸:초야에 있는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이 아니겠는가. 나 병탁(秉柝)이 이미 공의 유고(遺稿)를 가져다 다섯 책으로 편찬하여 인쇄를 했었다. 둘째 아들 동찬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아버님의 사적과 행실을 그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면서 억지로 글을 청하므로 끝내 사양할 수가 없어서 공의 세계(世系)와 사적을 이상과 같이 적는다. 그리고 그걸 줄여 다음과 같이 명한다. 명문 집안에 태어나 학문의 근원을 얻으셨네 篤生名門 學有本領 함양한 공부 굳게 지켜 조용하게 실천했네 持守涵養 用工於靜 지식과 행실 함께 닦아 정일하게 반성했네 知行幷進 精一猛省 매양 말씀하시기를 태극을 근래의 학자들은 每言太極 近世學者 고집하여 뜻을 미혹시켜 골자가 없게 했네 執言迷旨 爲無骨子 사물의 성질 편전함은 본연이 아니라네 物性偏全 謂非本然 마음을 논해서는 역시 기가 주장이라 했네 至於論心 亦主氣邉 기가 이의 자리 빼앗는 것도 큰 걱정이네 氣奪理位 是大憂焉 조금의 차이에서 오랑캐와 중화가 구분된다네 又云一髮 華夷是分 만약 이를 지키지 않으면 내 자손이 아니라네 岩不保此 非吾子孫 살아서 상대 않고 죽어서 네 제사 안 받겠네 生不對汝 死不歆汝 그 말씀 어찌 그리 간절하고 엄하셨는가 何其懇切 而又嚴 이에 이런 명을 후세에 알리노니 摭此爲銘 用詔來許 덕산의 이 무덤 그 누가 존경하지 않으리 德山之封 孰不敬慕 癸丑年 四月 十六日 죽산(竹山) 안병탁(安秉柝) 삼가 지음 족질(族姪) 광만(光萬)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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